[태일루의 시선] 전기는 수도권으로, 송전탑은 지방에… ‘47% 감축’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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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국가기간 전력망 건설 과정에서 송전탑을 대폭 줄이겠다는 방안을 내놨다. 기존 선로와 신설 선로를 통합하고 인구밀집 지역에서는 지중화를 확대한다. 계획대로라면 4,700여 기에 이르는 송전탑을 2,500여 기 수준까지 줄일 수 있다. 최대 47% 감축이다. 송전선로를 둘러싼 주민 갈등과 환경 훼손을 생각하면 반길 만한 방향이다.
하지만 숫자에서 한 걸음 물러나 보면 다른 질문이 생긴다. 송전탑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전기를 먼 거리까지 보내야 하는가.
현재의 전력망 계획은 발전지역과 소비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다는 현실을 사실상 전제로 한다. 발전소가 있는 곳에서 전기를 생산하고 대규모 송전망을 건설해 수요가 몰려 있는 수도권으로 보낸다. 송전탑을 줄이고 선로를 통합하고 일부 구간을 땅속에 묻는 것은 이 틀 안에서의 개선책이다. 근본적인 해법은 아니다.
에너지 전환 시대에는 이 전제부터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거 대규모 석탄발전과 원전 중심의 전력체계에서는 발전소 입지가 제한적이었다. 해안에 대형 발전소를 짓고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는 방식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전력 생산의 지형이 달라지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가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다. 동시에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처럼 막대한 전력을 사용하는 새로운 수요도 늘고 있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송전망 건설만이 아니다. 전기를 수요처까지 가져오는 대신 수요처가 전기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재생에너지 발전 여건이 좋은 지역에 전력 다소비 산업을 유치하고 지역에서 생산한 전력을 지역에서 소비하면 장거리 송전 수요 자체를 줄일 수 있다. 분산에너지와 RE100 산업단지가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발전소를 수요처에 가까이 만드는 것과 수요처를 발전소 가까이 옮기는 것은 같은 문제의 양면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수도권에 산업과 전력수요가 계속 집중될 것을 전제로 전력망을 설계하는 경향이 강하다. 수도권 수요가 늘어나면 지방에서 전기를 더 생산하고 이를 가져오기 위한 송전망을 추가한다. 송전망이 부족하면 다시 송전망을 건설한다. 수도권 집중이 새로운 송전망을 부르고, 새로 건설된 송전망은 다시 수도권 집중을 부추기는 악순환이다.
그 비용과 부담이 어디에 떨어지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전기는 지방에서 생산하지만 송전선도 지방을 지난다. 변전소가 들어서고 거대한 철탑이 산과 들을 가로지른다. 토지 이용에 제약이 생기고 경관이 훼손된다. 주민들은 오랜 갈등을 감수해야 한다.
반면 그 전력을 대량 소비하는 산업의 투자와 일자리, 인구와 세수는 상당 부분 수도권에 집중된다. 지방은 전력 생산과 송전에 따른 부담을 지고 수도권은 전력 소비를 통한 경제적 편익을 누리는 불균형이 생긴다. 전기는 지방에서 만들고 송전탑도 지방에 세우면서 산업과 일자리는 수도권에 더 모으는 방식이 지속 가능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송전선 주변 지역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것은 필요하다. 불편과 손실을 감수하는 주민에게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보상은 사후 대책이다. 주민에게 얼마를 줄 것인가를 논의하기 전에 왜 그 지역을 관통하는 대규모 송전선이 필요한지를 먼저 따져야 한다.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국가적 과제와도 맞닿아 있다. 정부는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 기업과 인구를 비수도권으로 분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지방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으로 운반한다. 지역이 가진 에너지 자원을 지역 산업을 키우는 기반으로 활용하기보다 수도권의 추가 수요를 뒷받침하는 데 사용하는 셈이 될 수 있다.
전력망 정책과 산업입지 정책을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이유다. 지방에 풍부한 전력이 있다면 그것 자체가 기업을 지방으로 유도하는 유인이 돼야 한다. 전력망을 산업을 따라 무한정 늘리는 것만이 아니라 산업도 에너지를 따라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지중화 문제도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송전탑을 줄이고 경관 훼손과 주민 갈등을 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요한 수단이다. 인구밀집 지역이나 불가피한 구간에서는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지중화는 공짜가 아니다. 지중 송전선로는 가공선로보다 건설비가 훨씬 높아질 수 있다. 공사 여건에 따라 비용 차이는 더 벌어진다. 유지보수와 사고 복구 방식도 달라진다. 어디까지 지중화할 것인지, 추가 비용은 얼마인지, 그 돈은 누가 부담할 것인지가 함께 제시돼야 한다.
송전탑 100개를 50개로 줄였다는 숫자만으로 정책의 경제성을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50개의 송전탑을 없애기 위해 훨씬 비싼 지중선과 추가 설비가 필요하다면 다른 선택지와 비용을 비교해야 한다. 산업과 전력수요를 분산했을 때 줄일 수 있는 송전망 투자비도 계산해야 한다.
발전지역 인근에 전력 다소비 산업을 배치했을 때의 비용과 편익도 따져봐야 한다. 송전망 건설비와 지중화 비용, 주민 보상비까지 포함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결국 비교해야 할 것은 송전탑의 숫자가 아니다. 국가와 사회가 최종적으로 부담해야 할 총비용이다.
물론 전력망 건설은 필요하다. 특히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해서는 부족한 계통을 확충해야 한다. 호남을 비롯해 재생에너지 발전 잠재력이 높은 지역에서 계통 부족으로 발전사업이 지연되는 상황도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필요한 전력망까지 수도권 집중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또 다른 오류다.
문제는 순서다.
먼저 전력수요를 분산할 수 있는지 살펴야 한다. 지역에서 생산한 전력을 지역에서 소비할 수 있도록 산업입지 정책도 바꿔야 한다. 기존 전력망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분산전원과 에너지저장장치 등을 통해 신규 송전망 수요를 줄이는 방안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하고도 필요한 송전망이라면 신속하게 건설해야 한다. 인구밀집 지역에서는 지중화를 검토하고 불가피하게 피해를 보는 지역에는 충분한 보상과 장기적인 이익 공유가 뒤따라야 한다. 필요한 망을 제때 짓는 것과 불필요하게 먼 거리까지 전기를 보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순서가 뒤집히면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수도권에 새로운 대규모 전력수요가 생길 때마다 지방에서 전기를 끌어오기 위한 송전망을 건설한다. 주민이 반발하면 지원금을 늘리고 송전탑이 문제가 되면 더 많은 비용을 들여 땅속에 묻는다. 언제까지 이런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전력망은 단순한 전선이 아니다. 발전소와 산업을 연결하고 지역과 지역을 연결하는 국가 인프라다. 어디에서 전기를 만들 것인지와 어디에서 전기를 사용할 것인지를 하나의 국토 전략 안에서 판단해야 한다. 전력망 계획과 산업입지 정책, 지역균형발전 정책이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 한다.
송전탑을 절반으로 줄이는 기술보다 필요한 것은 수도권으로 전기를 끌어와야만 하는 현실을 바꾸는 정책이다. 발전소가 있는 곳에 산업이 가고 전기가 있는 곳에 새로운 수요가 만들어져야 한다. 지역이 가진 에너지 자원이 지역의 산업과 일자리를 만드는 기반이 돼야 한다.
전력망 계획과 산업입지 정책을 따로 세워놓고 그 사이를 더 많은 송전선으로 연결하는 방식은 언젠가 한계에 부딪힌다. 송전탑을 덜 세우는 것보다 송전탑이 덜 필요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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