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루의 시선] 4개월 만에 20% 뛴 전력수요, 정부는 이 숫자를 믿으라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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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0년 최대전력 전망치, 불과 넉 달 만에 27GW 늘어나
AI와 반도체라는 이름만 바꿔 과거의 예측 실패 반복?
기업 뿐만 아니라 전체 국민 목소리 들어야
국가의 전력계획은 숫자에서 시작한다. 앞으로 전기를 얼마나 사용할지 예측하고, 그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발전소를 얼마나 지어야 할지 계산한다. 송전망과 변전소, 에너지저장장치(ESS) 투자도 이 숫자를 따라간다. 한번 건설하면 수십 년을 사용하는 국가 기간시설이다.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수요 전망의 신뢰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그런데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부가 내놓은 숫자가 불과 4개월 만에 크게 달라졌다. 지난 5월 정부가 공개한 수요전망안에서 2040년 전력소비량 목표수요는 657.6TWh, 최대전력 목표수요는 131.8GW였다. 8월 20일 공개된 전망에서는 각각 847.3TWh와 158.4GW로 올라갔다. 전력소비량은 189.7TWh, 28.8% 증가했고 최대전력은 26.6GW, 20.2% 늘었다.
15년 뒤를 내다보는 장기 전망이 달라질 수는 있다. 경제성장률도 변하고 산업구조도 달라진다. 인공지능이 산업과 사회를 어디까지 바꿀지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다고 국가 발전설비와 전력망 건설을 좌우할 핵심 숫자가 불과 넉 달 만에 20~30%씩 움직이는 것을 단순한 전망 수정으로 넘길 수는 없다.
둘 중 하나는 설명이 필요하다. 5월의 전망이 잘못됐거나 8월 전망이 과도하게 높아졌거나, 아니면 그 사이 국가 전력수요의 전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었어야 한다. 장기 전망이기 때문에 틀릴 수 있다는 설명도 충분하지 않다. 15년 뒤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은 5월에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넉 달 만에 이렇게 큰 차이가 발생했다면 정부는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정부 스스로 전기본에 대한 신뢰를 깎아먹는 셈이다.
이번 수요 증가의 중심에는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가 있다. 한국의 인구나 경제성장 전망이 넉 달 사이 급변한 것이 아니다. 정부가 대규모 첨단산업 프로젝트의 예상 전력수요를 추가로 반영하면서 전체 전망치가 크게 높아졌다. 반도체와 AI 산업에 충분한 전력을 공급해야 한다는 데 이견을 달 이유는 없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산업이고 전력 부족 때문에 투자가 좌절되는 상황도 막아야 한다.
그러나 기업의 투자계획과 실제 발생할 전력수요는 같은 것이 아니다. 공장 건설 계획이 발표됐다고 모든 생산라인이 예정된 시기에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데이터센터 역시 계획된 용량이 모두 현실화된다는 보장은 없다. 경기와 투자환경, 기술 발전과 기업 전략에 따라 사업 규모와 시기는 달라질 수 있다. 특히 AI 산업은 기술 발전에 따라 단위 연산당 전력소비량이 어떻게 변할지도 장기간에 걸쳐 지켜봐야 한다.
정부도 불과 몇 달 전까지 이 같은 불확실성을 인정했다. 5월 수요전망안에서는 기업이 제출한 첨단산업 수요 가운데 2030년까지 전기사용신청 물량은 100% 반영하되 그 이후 계획은 증분의 50%만 반영했다. 중장기 투자계획의 불확실성을 감안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넉 달 사이 어떤 사업이 구체화됐고, 각각의 실현 가능성을 어떻게 평가했으며, 기존의 보수적인 반영 원칙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공개해야 한다. 2040년 최대전력을 26.6GW나 올렸다면 그 정도의 설명 책임은 당연하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전력수요 예측 실패의 경험이 이미 있다는 점이다. 과거 국제유가와 석탄가격이 뛰는 상황에서도 이명박 정부가 전기요금 인상을 억제하면서 에너지 소비의 왜곡이 커졌다. 1차 에너지로 충당하던 수요 일부가 상대적으로 값싼 2차 에너지인 전기로 이동했다. 여기에 초유의 순환정전까지 발생하면서 전력 부족에 대한 공포가 커졌다.
다급해진 정부는 증가하는 전력수요를 충족한다는 명분으로 민간 석탄화력발전소 건설을 대거 허용했다. 문제는 이후 예상했던 만큼 전력수요가 증가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공급과잉이 발생했고 송전망까지 제때 확보되지 못하면서 동해안의 대형 석탄발전소들은 설비를 갖추고도 충분히 가동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 과정에서 약 1조원 규모의 비용 부담이 누적되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발전소를 필요 이상으로 건설한 대가는 사업자의 손실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전력시장 비용을 거쳐 결국 전기요금과 국민 부담으로 돌아온다.
수요예측이 틀리면 전망표의 숫자는 다시 쓰면 된다. 그러나 잘못된 숫자를 믿고 지은 발전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남는다. 발전소에 연결하기 위해 건설한 송전망도 남고 가동률이 떨어져도 투자비와 금융비용은 없어지지 않는다. 수요를 과소 전망하면 전력 부족이라는 위험이 있지만 과대 전망 역시 결코 공짜가 아니다.
이번 12차 전기본의 수요 전망을 엄격하게 검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과도한 전망이 또다시 대규모 발전소 건설의 명분으로 이용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수요를 크게 잡으면 어떤 발전원도 부족해 보인다. 2040년 최대전력이 131.8GW일 때와 158.4GW일 때 필요한 발전설비가 같을 수 없다. 26.6GW라는 차이는 향후 전원믹스 논의에서 막대한 추가 발전설비가 필요하다는 주장의 강력한 근거가 된다.
그 틈을 원전 확대를 주장해 온 이른바 '원전 마피아'와 대규모 발전소 건설을 통해 이익을 얻어온 석탄발전·토건 이해관계가 파고들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 과거에는 전력 부족과 순환정전의 공포가 민자 석탄화력발전소의 무더기 건설을 정당화했다. 이번에는 AI와 반도체가 그 자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 국가 첨단산업 육성을 위해 필요한 전력을 준비하는 것과 불확실한 미래수요를 부풀려 대규모 발전설비 건설의 명분으로 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렇다고 특정 에너지원을 처음부터 배제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순서가 중요하다. 먼저 미래 수요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그 다음 확인된 수요를 어떻게 충족할 것인지 따져야 한다. 불확실한 수치를 먼저 크게 잡아놓고 그 숫자를 다시 특정 발전원의 확대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정책이다.
재생에너지 정책과의 정합성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 정부는 지난 5월 2030년 재생에너지 누적 설비 100GW, 2035년 발전비중 30% 이상이라는 목표를 공식적으로 내놨다. 재생에너지를 주력전원으로 육성하겠다는 방향도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해 GW급 태양광 사업과 공장지붕, 영농형·수상형, 도로·철도·농수로 등 다양한 입지를 활용한 대규모 보급계획도 제시했다.
그런데 전력수요 전망을 크게 높였다면 재생에너지 계획 역시 새로운 수요 전망에 맞춰 다시 계산해야 한다. 2035년 발전비중 30%는 고정된 발전량이 아니다. 전체 발전량이 커지면 30%를 채우는 데 필요한 재생에너지 발전량도 증가한다. 정부가 8월의 상향된 수요 전망을 채택하면서 2035년 30% 목표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2030년 100GW 이후 5년 동안 재생에너지 설비를 얼마나 더 늘릴 것인지도 제시해야 한다. 수요의 분모만 바꾸고 공급계획의 한쪽을 과거 숫자에 남겨둘 수는 없다.
결국 12차 전기본을 둘러싼 논쟁의 출발점은 원전을 몇 기 더 지을 것인가도, 태양광을 몇 GW 더 설치할 것인가도 아니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훨씬 단순하다.
왜 2040년 최대전력 131.8GW가 불과 넉 달 만에 158.4GW가 됐는가.
전력소비량 전망을 28.8%, 최대전력을 20.2%나 높일 정도로 상황이 달라졌다면 정부는 그 근거를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어떤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프로젝트가 새롭게 반영됐는지, 어느 정도의 실현 가능성을 적용했는지, 5월의 전망과 산정 원칙에서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전기본은 산업계의 희망사항을 모아놓은 사업계획서가 아니다. 발전소와 송전망, 변전소와 ESS를 어디에 얼마나 건설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국가의 장기계획이다. 한번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면 되돌리는 데 수십 년이 걸리고 수조원의 비용이 든다. 과거 수요예측 실패와 과잉 발전설비가 남긴 비용을 지금도 치르고 있다면 그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AI와 반도체라는 이름만 바꿔 같은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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