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루의 시선] 축구 포백과 스리백보다 어려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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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이 떠올리게 한 대한민국 에너지 정책의 과제
월드컵 기간이다. 태양광과 전력망, 재생에너지 정책을 주로 다루는 지면에서 갑자기 축구 이야기를 꺼낸다고 독자들께서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친환경 전문지에서 웬 축구 칼럼이냐고 핀잔을 주셔도 달게 받겠다.
다만 축구를 오래 좋아해 온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국의 재생 에너지 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가끔은 두 분야가 놀랄 만큼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다른 영역처럼 보이지만,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과 꾸준한 투자, 그리고 방향을 유지하는 힘이 중요하다는 점에서는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최근 대한민국 대표팀은 여러 시행착오 끝에 사실상 스리백 체제로 무게 중심을 옮긴 모습이다. 벤투 감독 시절 대표팀은 4-2-3-1 체계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했고 선수들 역시 그 방식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나 홍명보 감독 취임 이후 대표팀은 다시 포백과 스리백 사이를 오갔고 월드컵 본선에서는 스리백 전술이 기본으로 자리잡았다.
스리백 자체를 문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세계 정상급 팀 가운데도 스리백을 활용하는 사례는 적지 않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형하는 팀도 많다. 다만 우리 선수들 상당수가 유소년 시절부터 포백 체계에서 성장했고 국내 최상위 리그인 K리그 역시 오랫동안 포백을 중심으로 운영돼 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새로운 체계가 짧은 시간 안에 완성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처럼 보인다.
스리백에서는 중앙 수비수들의 역할이 달라지고 측면 수비수는 윙백으로서 훨씬 넓은 활동 범위를 요구받는다. 미드필더의 움직임과 압박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결국 포메이션의 숫자가 바뀌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선수들의 몸에 익은 습관과 판단을 바꾸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대표팀이 때때로 어색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특정 감독의 능력 부족 때문이라기보다 새로운 체계가 자리 잡아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술의 변화는 선언으로 시작할 수 있지만 실제 완성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 축구의 변화는 전혀 다른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 역시 처음부터 강팀은 아니었다. 한때는 기술은 좋지만 체력과 몸싸움에서 밀린다는 평가를 받았고 중요한 순간마다 한계를 드러내곤 했다.
그러나 일본은 유소년부터 프로 무대, 국가대표팀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일관된 전술 방향을 유지하면서 오랜 시간 경험을 축적해 왔다. 감독이 바뀌더라도 갑자기 완전히 다른 축구를 시도하기보다는 기존의 바탕 위에서 조금씩 변화를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고 그 결과 선수들은 대표팀에 소집되더라도 비교적 익숙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최근 일본 대표팀이 강호들을 상대로도 대등한 경기를 펼치는 모습을 보면 단순히 개인 기량의 향상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과거 일본 축구의 약점으로 지적됐던 체력과 강도까지 상당 부분 보완되면서 이제는 기술과 조직력, 활동량을 모두 갖춘 팀으로 성장한 모습이다.
반면 한국 축구는 차범근과 박지성, 손흥민으로 이어지는 세계적 선수들을 꾸준히 배출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세대가 바뀔 때마다 비슷한 고민이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 왔다. 뛰어난 선수들의 존재는 분명 한국 축구의 자랑이지만 때로는 개인의 능력이 팀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를 잠시 가려 주는 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일지 모른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문득 대한민국 재생에너지 정책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역시 지난 수십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어 왔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강조점이 달라졌고, 에너지 정책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도 끊이지 않았다. 어느 시기에는 재생에너지 확대가 국가적 과제로 제시됐고, 어느 시기에는 원전의 역할이 다시 강조됐다.
최근에는 논쟁의 주제 자체가 바뀌고 있다. 이제는 원전이냐 재생에너지냐를 넘어 전기를 어디에서 생산하고 어디에서 소비할 것인가, 수도권에 집중된 산업 구조를 계속 유지할 것인가, 지방이 발전소와 송전선로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현재의 방식이 지속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지산지소와 분산에너지 확대, 산업단지 지방 이전 논의가 등장한 배경 역시 결국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력 소비는 수도권에 집중돼 있지만 발전 설비는 지방에 몰려 있고, 전기를 실어 나르기 위한 송전망 건설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지역 주민들은 발전소와 송전선로를 감내하지만 정작 전력 소비의 혜택은 수도권이 누린다는 불만도 꾸준히 제기된다. 그렇다고 산업단지를 하루아침에 지방으로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업들은 이미 구축된 인력과 물류, 협력업체와 산업 기반을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방향은 정해질 수 있어도 현실이 따라가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재생에너지 산업이 겪고 있는 어려움 역시 비슷한 측면이 있다. 분산에너지를 이야기하지만 산업은 여전히 수도권에 집중돼 있고, 계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지만 송전망 확충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전력망 투자보다 출력제어가 먼저 늘어나면서 사업자들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태양광 발전소는 짧게 운영하고 끝나는 설비가 아니다. 한 번 건설하면 20년 이상 운영해야 하는 자산이며 송전망 역시 수년의 공사 기간과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국가 기반 시설이다. 그래서 시장은 무엇보다 예측 가능성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정책보다 내년의 정책이 중요하고, 내년보다 10년 뒤의 방향이 더 중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축구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은 포백과 스리백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 어려운 일은 선수들이 같은 생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는 일이고 감독이 바뀌더라도 팀의 바탕이 유지되도록 만드는 일일 것이다.
에너지 정책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원전과 재생에너지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장이 신뢰할 수 있는 긴 호흡의 계획을 마련하고 전력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차근차근 쌓아 가는 일이다.
월드컵 경기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국가 경쟁력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천재 한 명이 만들어 내는 결과라기보다 오랜 시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쌓아 올린 경험과 인내가 만들어 내는 결과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전환은 선언으로 시작될 수는 있어도 선언만으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축구든 에너지 정책이든 결국 시간을 견뎌낸 축적이 경쟁력을 만든다는 사실만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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