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헤일메리]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이 E-북으로만 나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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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다. 책은 고전적인 가치다. 책을 다루는 영화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많다. 아주 많다. 책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도 있고 책 한 권을 놓고 살육전을 벌이는 얘기도 있다. 책 따위는 이제 필요 없어진 시대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도 있다. 탕웨이가 주연한 영화 <북 오브 러브>(2016)는 각각 마카오와 LA 사는 주인공 남녀가 책 한 권을 놓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애(질)를 하는 얘기다. 할리 퀸 유의 영화다. 옛날 같으면 프랑수아 사강이 쓴, 여고생들이 좋아할 만한 팬시한 느낌의 소설 같은 영화라는 의미다. 이 영화에 나오는 책은 헬렌 한프가 쓴 『채링크로스 84번지』란 자전적인 서간문 에세이다. 이 에세이도 1949년부터 1969년까지 20년 동안 뉴욕의 한 라디오 방송사에서 구성작가를 했던 헬렌 한프가 영국 채링크로스 84번가에 있는 마크스 서점의 매니저 프랭크 도엘과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책이다. 책은 종종 시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애를 구현한다.
밀레니엄 직전에 출간돼(일본 1999년, 한국 2000년) 2천년대 초반 내내 베스트셀러와 스테디셀러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백 만권 이상 팔려나간(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책 『냉정과 열정 사이』는 에쿠니 가오리라는 여성 작가와 츠지 히토나리라는 남성 작가가 공동으로 썼다고 해서 화제와 되었던 작품이다. 당연히 영화로 만들어졌다. 일본의 대형 미디어 그룹인 카도카와 쇼텐과 메이저 영화사인 도호가 공동 제작한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는 일본 배우 다케노우치 유타카와 홍콩 배우 진혜림이 출연해 사람들 사이에 두오모 성당 열풍이 일게 했다. 영화(소설) 속에서 지독하게 사랑했던 두 남녀가 역시 지독한 오해 끝에 헤어진 후 7년이 지나 이탈리아 두오모 성당에서 재회하는 얘기이고 소설이 주지 못한 두오모 성당의 풍광을 영화가 구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 이런 책을 보면 20여 년 전의 세상은 차라리 순수했다고 할 만큼 순진하고 한가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영화 <투모로우>(2004)는 기후 온난화로 북극의 얼음이 녹고 그 차가운 물의 온도가 다시 빙하기 수준의 혹독한 한파를 가져온다는 내용이다. 영화에서 책은 땔감으로 전락한다. 뉴욕에서 대학에 다니는 주인공 잭(데니스 퀘이드)의 아들 샘(제이크 질렌할)은 엄청난 한파가 덮친 뉴욕 공공도서관에서 생존을 위해 책을 태운다. 두꺼우면 두꺼울수록 땔감으로 좋은 터이다. 니체의 철학책을 태운다. 그때 누군가 말한다. “니체의 책은 안 돼!” 그러나 니체의 철학책 따위는 구텐베르크의 성경 초판본에 비할 바 아니다. 도서관 사서는 이 책만큼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영화 <투모로우>의 도서관 장면은 꽤 인상적이다.
인류에게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인류의 삶과 기술을 진보시키고, 진화시킨 그 위대한 역사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책을 읽든 안 읽든 상관없이 책을 좋아하는 장서가들도 많다. 책을 매일 같이 끼고 다니며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묘한 종이(인쇄) 냄새에 중독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엄청난 독서가 중에서 대단한 석학이 나온다. 일본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개인 장서가 20만 권이 넘고 그걸 위해 개인 도서관을 만들었을 정도다. 다카시의 도서관은 도쿄 방문 시 가봐야 할 관광명소 중 하나가 됐다. 다치바나의 서가는 감탄을 자아낸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란 책까지 나와 있다.
편집자 주) 2021년 다치바나 다카시 사후 개인 도서관은 더 이상 운영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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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치바나 다카시의 도서관 고양이 빌딩의 내부. 사진 출처 : 다치바나 다카시 홈페이지
그럼에도 책으로 인한 종이의 생산, 그로 인한 무분별한 벌목과 숲의 파괴는 인류 현대사의 명암이 되고 있다. 책이 환경파괴의 주범이 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제는 그럴 위험성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매년 전 세계적으로 생산되는 종이의 양은 약 4억 톤으로 알려져 있다. 이 4억 톤을 위해 매년 최소 40억 그루에서 최대 80억 그루의 나무가 베어지고 있고 이것 때문에 매년 사라지는 숲의 면적이 330만 헥타르인데 이는 남한의 1/3 수준이다.
숲이 사라지면 당연히(!) 온실가스 배출량이 12%가 늘어난다. 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할 나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아마존 우림과 북구 원시림(러시아, 스칸디나비아, 캐나다)의 무분별한 벌목이 늘 문제로 지목되어 왔다. 물론 아마존 같은 경우 종이생산만을 위해 벌목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규모 축산(소고기 생산)을 위해 나무를 제거하고 있고 그 일부가 제지산업 용도로 쓰이고 있다. 환경을 보호하고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는 육식의 문제와 책 읽기의 문제가 다르지 않은 것임을 보여 준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책을 어떻게 규제하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무엇보다 사람이 지닌 기이할 만큼의 생래적인 책에 대한 욕망, 그 지적 욕구를 억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행스럽게도 책의 경우 자원 회수율이 높은 편이다. 책은 2차, 3차 종이로 재생산된다. 최대 7번까지 재생 종이로 거듭날 수 있다. 폐지 활용은 한국과 일본이 압도적으로 앞서나간다. 한국은 거의 90% 가까이 종이 자원이 회수되고 있고 일본은 80% 수준, 미국은 60%대다. 종이 1톤(A4 용지 박스 80개)을 재생하면 나무 17그루를 살릴 수 있다고 한다. 쓰레기 분리수거 과정에서 종이(박스)를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높은 회수율이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9월의 추석 명절 기간에 정부청사가 있는 세종시에서는 분리수거장이 아수라장이었던 모양이다. 명절 때 주고받은 선물 세트들의 후유증이다. 종이박스와 스티로폼이 산을 이뤘다고 했다. 명절 선물에도 과대 포장이 많고 종이 사용이 일시적으로 급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종이 재생에도 엄청난 양의 물과 석유 같은 화석연료가 들어간다. 재생이 환경 문제의 원천을 100% 회복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추석 명절 선물도 다른 방식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이다. 할 일이 많다.
책은 없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소유를 조금 공유화할 필요가 있다. 장서를 보유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방법을 계발할 때다. 도서관 이용이 제일 좋다. 책이 있는 곳을 개인의 서가 중심에서 공공의 도서관 중심으로 생각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중고 서점이 많아지는 것도 좋은 일이다. 책의 총량을 줄일 수 있는 단계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취향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만 E-북의 사용을 넓힐 필요도 있다. 디바이스의 시간 양을 늘리는 것도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유명 작가가 베스트셀러가 예상되는 책을 낼 경우 E-북 단독 출판을 실험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 『카호』가 E-북으로만 나온다면? 개인에게 소용이 다 해 불필요해진 책은 빨리빨리 재생 종이로 순환시킬 필요도 있다. 『냉정과 열정 사이』 같은 책은 청춘 시절이 지나면 다음 청춘에게 빨리 물려 주거나 더 늙으면 종이 자원으로 회수해야 한다. 어쩌다 <투모로우>의 샘처럼 모두 땔감으로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지구 멸망의 디스토피아 영화 <일라이>에서 폐허가 된 마을을 지배하는 악당 카네기(게리 올드만)는 맹인 검객이자 총잡이인 일라이(덴젤 워싱턴)가 백팩에 갖고 다니는 책을 탈취하려고 온갖 패악을 저지른다. 결국 일라이에게 총을 쏘고 책을 뺏지만 이게 다 점자로 되어있다는 걸 알게 되고 경악한다. 일라이는 쉘터에서 죽기 직전까지 자신이 암기한 책 전체를 구술해 낸다. 인류에게 ‘이 책’이 복원된다. 인류가 다시 평화기를 맞을 것임을 영화는 암시하고 끝난다. 이상한 액션 활극이지만 인류에게 책 한 권이 주는 중요성, 더 나아가 인간이 책에 대해 지니는 큰 욕망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을 작품이다.
종이책은 벌목으로 인한 기후변화의 문제, 수자원이나 화석연료의 사용에까지 연결돼 있다. 특히 재생과정에서 그렇다. 기후변화와 에너지의 문제는 씨줄과 날줄로 서로 연결돼 있다. 나무숲을 번창시키는 것도 태양이고 나무숲의 에너지를 재생시키는 것도 태양일 수 있다. 태양의 수명은 50억 년 남았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글쓴이 소개]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나왔다. 연합뉴스, 와이티엔(YTN) 등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영화 주간지 <필름2.0(FILM2.0)>과 <씨네 버스(cine bus)>, <엔키노(nKINO)> 등에서 영화 전문 기자 및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부산국제영화제 마켓위원장,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집행위원장, 부산 동의대학교 영화과 초빙교수 역임, 현재 들꽃영화상 운영위원장,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작은 영화가 좋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불온한 영화를 위하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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