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루의 시선]“원전은 끝났다”를 고집하는 나라 – 독일의 뚝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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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한 번 내뱉은 말을 얼마나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가의 예술이다. 독일은 2011년 후쿠시마를 본 순간, 원자력과의 이별을 결정했다. 그리고 2025년 오늘, 그 약속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 원전 재개 안건이 독일 의회에서 다시 부결되었다. 국민 절반 이상이 찬성했지만, 정부는 듣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히 “국민은 틀렸고 정부가 옳다”는 오만이 아니다. 더 복잡하고 단호한 계산이다.
첫째는 정치다.
독일 정부, 특히 녹색당과 사회민주당의 정체성은 탈원전이다.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자기부정을 넘어 정권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원전을 꺼내는 순간, “정권이 흔들린다”는 공식은 독일에서도 유효하다. 한 번 민심에 고개 숙인 정당은 다시는 일어설 수 없다. 그래서 정권은 끝까지 간다. 자기 입으로 약속한 길 끝까지.
둘째는 철학이다.
독일은 에너지를 단순히 ‘전력’이 아니라 ‘사회구조’로 본다. 중앙집중형, 국가주도형, 폐기물 장기보관이 필요한 원전은 ‘시대착오적’이라는 게 독일식 진단이다. 대신 분산형 재생에너지, 시민참여형 발전소, 에너지 민주주의가 독일이 꿈꾸는 모델이다. 여기서 원전은 기술이 아니라 이념의 적이다. 에너지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른 나라다.
셋째는 실리다.
독일이 원전을 포기한 건 환경감성이나 정치적 명분 때문만은 아니다. 계산기 두드려 본 결과, 도저히 이득이 안 나오는 장사였기 때문이다.
먼저 시간.
지금이라도 원전을 다시 돌리려면 최소 2~3년 이상 걸린다. 폐쇄된 원자로는 가동을 중단하면서 연료봉을 빼내고 냉각한 상태다. 이걸 다시 돌리려면 안전 점검, 설비 교체, 규제 통과, 인력 재배치가 필요하다. 돈도 돈이지만 시간이 문제다. 그 사이 재생에너지는 이미 설치되고, 시장은 이미 재편된다.
다음은 돈.
원전 건설과 유지비는 갈수록 치솟고 있다. 프랑스의 최신형 원전(EPR)은 예산이 3배 이상 초과됐고, 완공은 10년 이상 지연되고 있다. 독일도 이 사정을 모를 리 없다. 전기를 더 싸게, 더 빨리, 더 유연하게 생산할 수 있는 태양광과 풍력이 있는데 굳이 단가 비싸고 리스크 높은 원전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
또 하나, 유연성.
원전은 한 번 켜면 껐다 켜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데 전력 시장은 지금 그 반대다. 날씨, 수요, 수출입 변수에 따라 매시간 공급량을 조정해야 한다. 이 변동성을 감당할 수 있는 건 재생에너지 + 저장장치 + 수요반응 체계다. 원전은 이 시스템에 맞지 않는다. ‘고정비 중심의 느린 에너지’는 이미 낡았다.
그리고 인력.
젊은 엔지니어들이 원자력 산업으로 안 간다. 독일은 이 문제를 일찌감치 인식했다. 교육도 투자도 줄였다. 그 결과, 지금 원전을 재가동하려 해도 엔지니어가 없다. 현실은 이미 탈원전이다.
결국 따져보면, 독일이 선택한 건 ‘이념’이 아니라 ‘실리’였다. 원전은 위험해서가 아니라,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다. 돈, 시간, 시장, 인력, 유연성—모든 지표에서 이미 진 게임이다. 원전을 붙잡고 있는 쪽이 오히려 과거에 발이 묶인 셈이다.
넷째는 책임이다.
고준위 폐기물은 여전히 영구처리장을 못 찾았다. 탈원전을 포기한다는 건, 다시 수천 년짜리 쓰레기를 새로 생산하겠다는 뜻이다. 그걸 후세에게 넘기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독일은 그 대가를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못 돌아간다. 책임 없는 기술은 기술이 아니다.
다섯째는 태도다.
유럽 곳곳에서 원전을 재개하거나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프랑스, 체코, 핀란드, 헝가리. 그러나 독일은 다르다. 독일 정부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프랑스와 다른 길을 간다.”
말은 짧지만 무겁다.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지 않는 데 필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철학이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보자. 우리는 지금 어떤 철학으로 에너지 정책을 결정하고 있는가.
에너지 자립을 외치며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동시에 밀어붙이고, 신재생 예산은 깎고, 폐기물 문제는 말도 꺼내지 않는다. 정말 ‘정책’인가? 아니면 그냥 눈앞의 단기 성과와 정치적 꼼수의 조합인가.
독일은 원전을 포기하지 않은 나라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 길을 확신 있게 걷는다.
한국은 지금, 어디쯤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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