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루의 시선]스페인 대정전 사태가 보여준 ‘구시대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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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망이 멈췄을 뿐 재생 에너지 전환은 멈추지 않는다.
지난 4월 말, 스페인 전역이 정전에 휘말렸다. 포르투갈 일부까지 포함해 수만 의 발이 묶였고, 공항과 철도는 멈춰섰다. 전력의 60%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정전은 수 시간에 걸쳐 이어졌다. 처음엔 으레 그렇듯 ‘재생 에너지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다. 전기차와 태양광 패널, 풍력 발전기를 탓하는 익숙한 레퍼토리. 하지만 원인을 조사한 스페인 정부는 단호했다.
“아니다. 이건 재생 에너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고의 핵심은 ‘전압 불안정’이었다. 문제는 재생에너지가 아니라 열병합발전소·가스·원자력이라는 기존 발전 인프라의 준비 부족이었다. 고수요 시간대에 안정적인 전압을 유지해야 했던 기존 설비가 역할을 못한 것이다. 전압이 흔들리자 자동화된 시스템이 줄줄이 발전소 가동을 중단했고 정전은 도미노처럼 번졌다.
재생 에너지의 ‘간헐성’이 아니라, 구식 그리드의 ‘경직성’이 문제였던 셈이다.
정전 이후 정부는 즉각 반응했다. 전력망 운영기관(REP)의 과실을 지적했고, 사이버 공격이나 외부 침입은 없다고 못 박았다. 이어 “이 사태를 계기로 에너지 전환의 속도를 늦추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그 단어 하나하나에 정부의 방향이 담겨 있다. 정전은 과거 시스템의 한계에서 비롯됐고, 그 해법은 미래에 있다는 인식이다.
이번 사건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눈여겨봐야 할 사례다. 전력망이 흔들릴 때마다 재생에너지 탓을 하는 ‘수구적 반사 신경’은 이제 그만 멈출 때가 됐다. 문제는 대개 재생에너지가 아니라 재생에너지에 대비하지 않은 그리드 설계와 관리 체계다.
스페인은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
정전은 있었지만 전환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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