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루의 시선] 속도를 잃은 에너지 정책, 내년 지방선거가 마지막 시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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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논란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정부 조직 개편의 상징이 될 줄 알았던 기후에너지부 신설은 후퇴했고 한수원이 체결한 웨스팅하우스 계약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기술 주권을 잃었다는 자책을 낳는다. 여기에 AI 데이터센터 전력 위기는 산업의 미래를 가르는 전쟁처럼 다가온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터진 이 논쟁들은 결국 같은 질문으로 귀결된다. 한국이 기후와 에너지의 시대에 어떤 전략을 택할 것인가.
기후와 에너지를 통합 관리한다는 발상은 처음엔 혁신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 결과물은 분리와 후퇴다. 정부는 환경부를 기후에너지환경부로 개편하면서 일부 기능만 이관했고 원전 수출과 자원은 산업부에 남겼다. 2050 탄소중립 녹색성장위원회는 이름을 바꿔 기후위기대응위원회로 개편됐지만 큰 그림은 사라졌다. 애초 공약은 산업 논리 일변도의 에너지 정책을 기후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지만 최종 결과는 오히려 기후와 에너지를 다시 쪼개는 방식이었다. 기후 환경 단체들은 ‘정책의 통합적 접근이 무너졌다’고 비판했고 전문가들은 ‘탄소중립 실행에 혼란과 갈등을 불러올 것’이라 경고했다. 결국 규제와 진흥을 분리해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고 공약의 상징성이었던 통합적 컨트롤타워 구상은 사실상 폐기된 것이다.
한수원이 웨스팅하우스와 체결한 계약은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에 따르면 읽는 순간 무력감을 안겨준다. 50년이라 적혀 있지만 자동 연장 조항 때문에 사실상 영구 계약이고 원전 1기마다 1조 원에 달하는 비용을 지속적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독자 기술을 개발해도 웨스팅하우스의 검증을 받아야 시장에 나갈 수 있는 구조다. 시장 권역도 제한적이다. 동남아와 일부 신흥국에는 길이 열렸지만 북미·유럽·일본 등 전략적 시장에서는 길이 막혔다. 한수원과 한전은 불가피했다고 설명했지만 전문가들은 ‘소송 리스크를 피하려다 스스로 족쇄를 찬 셈’이라고 평가한다. 기술 자립과 시장 자율성을 잃은 대가는 수십 년 뒤 한국 원전 산업 경쟁력의 쇠퇴로 돌아올 수 있다. 정치권에서는 ‘노예 계약’이라는 거센 비판이 나오고 산업계는 향후 수출 협상력이 크게 약화될 것을 우려한다.
이 계약이 체결된 배경을 살펴보면 사정은 복잡하다. 웨스팅하우스가 2022년 한국 원전 수출을 상대로 지재권 침해 소송을 제기하면서 협상이 시작됐다. 소송이 장기화되면 원전 수출 자체가 막힐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면서라도 합의가 필요했다는 논리가 작동했다. 하지만 산업계 일각에서는 ‘차라리 국제 중재로 갔어야 했다’는 반론도 제기된다. 결국 당장의 수출 기회를 지키려다 장기적인 기술 주권을 포기했다는 비판과 불가피한 현실적 선택이었다는 두 평가가 엇갈린다.
AI 산업은 전력을 잡아먹는 괴물처럼 성장한다. 국제에너지기구는 2030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현재의 두 배 이상 늘어날 것이라 경고했다. 구글은 우주 데이터센터 구상을 내놓았고 마이크로소프트는 해저 데이터센터 실험을 통해 냉각 효율을 검증했다. 아마존은 SMR 기업과 손잡고 소형 원자로 전력 공급을 준비 중이다. 글로벌 기업들은 이미 현실적 대안을 찾고 있다.
한국도 사정이 심각하다. 발전소는 늘었지만 송전망이 따라주지 못해 병목이 일상화됐다. 주민 반발과 규제로 송전망 확충은 십 년씩 지연되고 그 사이 AI 경쟁력은 급격히 벌어진다. 전력은 있는데 흘려 보낼 길이 없다는 역설이 한국의 현주소다. 지역별로는 경기·수도권 전력 수요가 폭증했지만 송전선로는 20년째 제자리다. 전문가들은 ‘에너지 고속도로를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남아도는 재생 에너지 활용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터센터 전력 위기는 단순한 에너지 문제가 아니라 국가 AI 주권의 위기이자 산업 정책의 시험대다.
현 정부는 인수위 없는 출범으로 성과를 보이기엔 시간이 짧다. 그러나 재생 에너지 사업자들의 기대에 비해 속도는 더디다. 이대로라면 문재인 정부 때처럼 정책이 기득권의 반발 속에 좌초할 수 있다. 남은 시간은 내년 6월 지방선거까지다. 동력을 잃기 전에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확정해야 한다. 특히 지방 선거는 단순히 정권의 중간 평가가 아니라 지역 단위 에너지 정책의 시험장이 될 것이다. 재생 에너지 인허가, 송전망 확충, 입지 갈등 같은 문제는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 풀려야 한다. 지방 정치에서 기후와 에너지가 뒷전으로 밀린다면 중앙정부 정책도 추진력을 잃는다.
기후와 에너지 정책은 선언의 언어가 아니라 정치의 생존과 산업의 존망을 가르는 실제의 시간표다. 한국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통합적 컨트롤타워를 포기한 정부 조직 개편, 불평등 계약으로 논란이 된 원전 수출, 송전망 병목 속에 커져 가는 데이터센터 위기, 이 세 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은 같다. 속도를 내지 못하면 기후와 에너지 전환은 또다시 미완으로 끝날 수 있다. 내년 여름까지 남은 시간은 길지 않다. 정책은 말이 아니라 실행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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