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일루의 시선] 유럽 기후전략, 리더십을 잃을 것인가 지켜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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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다시 한 번 기후를 권력의 언어로 세우려 한다. 탄소는 대기 속의 무해한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국경세를 정당화하는 관세표이며 금융시장에서 거래되는 증권이고 국제 회의장에서 휘둘러지는 규율의 도구다. 2050년 탄소중립, 2040년 90% 감축이라는 숫자는 과학의 계산이자 동시에 외교의 무기다.
유럽연합(EU)은 이미 2021년 ‘유럽기후법(European Climate Law)’을 제정하면서 2050년 탄소중립을 법으로 박아넣었다. 중간 단계로는 2030년까지 1990년 대비 최소 55% 감축을 약속했다. 지금까지 성과는 나쁘지 않다. 2023년 기준 이미 약 37%를 줄였고 회원국들의 정책이 제대로 이행된다면 2030년 -54%까지는 가능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2030년 이후의 길은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7월, 2040년까지 90% 감축을 목표로 하는 기후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동시에 2035년 국가결정기여(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NDC)도 이 목표와 연동해 제출할 계획이다.
여기서 중요한 수치가 등장한다. 2030년 -55%와 2040년 -90% 사이의 중간값은 -72.5%다. EU는 이 수준을 2035년 목표로 설정하려 한다. 그러나 선형 경로를 적용하면 -66.2%로 조정될 수도 있다. 숫자 자체는 과학적 계산의 결과지만 그 숫자를 현실로 옮기는 순간 정치와 경제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독일·폴란드·헝가리·프랑스 등은 최근의 에너지 위기와 경기 침체를 이유로 목표 완화와 감축 방식 재검토를 주장하고 있다. 프랑스는 아예 2035년 목표를 2040년과 분리해 별도로 결정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환경 단체와 좌파 정당, 다수의 시민들은 목표 후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외친다. 브뤼셀은 지금 갈라진 대륙의 풍경 속에서 수치의 정치를 하고 있는 셈이다 .
기술에 의존하는 낙관, 그러나 현실은 지연
보고서는 기술의 불확실성도 직시한다. CCS(탄소 포집 및 저장), BECCS(바이오에너지 기반 CCS), DACCS(직접 대기 탄소 포집)는 2040년 목표 달성 경로에서 반드시 필요한 수단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현재 DACCS는 전 세계적으로 킬로톤 단위에 불과하다. 2040년까지는 천 배 이상 확대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CCS 역시 지금의 110에서 150배까지 확대가 요구된다. 지난 수십 년간 비용 절감에서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한 상황에서 이 기술들이 갑자기 값싸고 대규모로 확산될 것이라 낙관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일 수 있다.
그럼에도 EU 집행위는 기술 중립성과 비용 효율성을 강조하며 정책을 설계했다. 국제 탄소 배출권의 활용을 최대 3%까지 허용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하지만 과학자들과 시민단체는 강하게 반발한다. “국제 크레딧은 보조 수단일 뿐 목표 완화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들의 목소리다. 기후 목표가 신뢰를 얻으려면 실제 감축이어야 하며 장부상의 회계 처리로는 국제 사회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평등과 신뢰의 문제
사회적 불평등도 심각한 변수다. 2027년부터 시행될 EU-ETS2(유럽 배출권 거래제 2단계)는 가계에 직접 부담을 준다. 난방비와 교통비가 오르면서 저소득층의 삶이 흔들릴 수 있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 EU는 사회기후기금(Social Climate Fund)을 마련해 저소득층 지원, 건물 에너지 효율 개선, 친환경차 구매 지원 등을 계획했지만, 그 규모와 실효성은 여전히 논란이다.
산업계의 불만은 또 다른 차원이다. 철강·시멘트·알루미늄 등 에너지 다소비 업종은 탄소 가격제 강화가 역외 이전을 촉발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공장이 유럽을 떠나 아시아나 아프리카로 이동한다면 지구 전체 배출량은 줄지 않고 유럽만 고용과 세수를 잃게 된다. 기후 정의와 경제 정의가 엇갈릴 때 정치적 균열은 더 깊어진다.
정책 신뢰성도 위태롭다. 2030년 -55%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2040년 목표도 공허해진다. 투자자와 시민의 신뢰가 무너지면 장기 투자를 이끌 동력이 사라진다. 신뢰는 기후정책의 보이지 않는 자본이다.
시민들의 지지와 정치의 갈림길
아이러니하게도 시민들의 지지는 여전히 높다. 유럽 내 여론조사에서 85%는 기후변화를 심각한 문제로 본다고 답했다. 81%는 2050년 탄소중립을 지지한다. 폭염과 홍수, 산불이 계절의 풍경이 된 유럽 대륙에서 기후 행동은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갈림길에 서 있다. 보수·우파 정당은 90% 감축 목표가 과도하다며 완화를 요구한다. 산업계는 비용을 이유로 현실적 타협을 주장한다. 반면 환경 단체와 진보 세력은 목표 유지와 강화만이 유럽의 리더십을 보장한다고 말한다. 결국, 유럽의 기후법 개정안은 COP30 이전까지 의회와 이사회의 조율을 거쳐야 한다. 합의는 더디고, 시계는 빠르다.
국제 질서 속의 화폐
탄소 중립은 더 이상 환경 정책의 범주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국제 무역 질서의 언어이며 글로벌 규범을 선도하려는 유럽의 전략적 도구다. 유럽이 설정한 수치는 과학적이지만 그 수치를 지켜내려는 정치적 결단은 권력의 언어로 번역된다.
그러나 목표를 완화하는 순간, 유럽은 산업을 지키려는 현실에 타협한 대가로 리더십을 저당잡히게 된다. 기후 화폐의 가치는 엄격한 약속에서 나오지 흔들리는 타협에서 나오지 않는다.
결국 유럽은 선택해야 한다.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국제 질서의 기후 리더십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단기적 안정을 위해 목표를 완화하고 장기적 신뢰를 잃을 것인가. 기후의 세계 질서에서 주도권은 한 번 양도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탄소 중립은 유럽이 쥔 마지막 화폐라는 견해가 많다. 그리고 그 화폐를 지켜낼 수 있을지 아니면 스스로 가치를 떨어뜨릴지는 지금 이 순간의 결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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