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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경의 아세안 에너지 워치

[고영경의 아세안 에너지 워치] 드디어 전력시장 구조개혁에 나선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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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경
2026-08-05 08:1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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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요구하고 아들이 발의한 사릴링 쿠리엔테(Sariling Kuryente·내 전기)법


세계적으로 봐도 소득 대비 비싼 수준의 전기요금으로 비난을 받던 필리핀이 전력법 개정에 나섰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이 2026 7 27일 제5차 국정연설(SONA)에서 전력산업개혁법(EPIRA) 개정을 요구했고, 하원은 이틀 만에 법안으로 화답했다.


에너지부 집계로 지난 6월 필리핀의 평균 요금은 싱가포르를 제치고 아세안 최고를 기록했다. 소매요금을 보조하는 이웃 나라들과 달리 필리핀은 원가를 보조하지 않는다. 소득은 일본의 10분의 1인데 요금은 일본과 비슷한 정도니 그 부담은 실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다.


먼저, 마르코스 대통령이 개정을 요구한 EPIRA는 어떤 법인가?


EPIRA(공화국법 제9136) 2001년 국가전력공사의 독점을 깨기 위해 만들어졌다. 발전·송전·배전·판매를 분리해 민간에 열고 도매현물시장을 세워, 경쟁으로 요금을 낮추겠다는 것이었다. 25년 뒤의 모습은 다르다. 에너지규제위원회(ERC) 자료 기준 아보이티스·산미겔·퍼스트젠 등 상위 3개 발전사가 전국 설비의 55%를 쥐고 있다. 분리했던 발전과 배전은 장기공급계약과 계열관계로 다시 묶였다. 민간 배전 회사인 메랄코(Meralco) 2026 7월 전력 조달을 보면 72%가 장기전력공급계약(PSA)에서 나오고 도매현물시장(WESM) 비중은 6%에 그친다. 도매 경쟁시장이 실제로 가격을 매기는 물량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주목할 회사 중 하나가 민간 배전 거물인 '메랄코(Meralco)'. 2025 4월 프랜차이즈가 갱신돼 2053년까지 사업이 보장됐다. 법률상 배타적 독점은 아니다. 헌법과 해당 법률 모두 그렇게 못 박고 있다. 그러나 배전망이 하나뿐인 이상 현실은 독점에 가깝다. 규모를 보면 왜 이 회사가 논쟁의 중심인지 알 수 있다. 메트로 마닐라 전역과 불라칸·카비테·리살 주 전체, 그리고 바탕가스·라구나·케손·팜팡가 일부를 포함해 39개 시와 72개 지자체가 프랜차이즈 구역이다. 면적은 약 9,685㎢로 국토의 3% 남짓이지만, 전국에서 쓰는 전기의 절반 이상이 이 안에서 소비된다. 메랄코의 핵심순이익은 2021 246억 페소(약 5,900억원)에서 2025 506억 페소(약 1조 2,100억원)으로 4년 만에 두 배가 됐다. 요금이 비싸다는 논쟁이 이어지는 동안 벌어진 일이다.


대통령이 겨눈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시스템 손실(System Loss) 요금이다. 발전소에서 계량기까지 오는 동안 사라지는 전기노후 설비의 기술적 손실과 도전(盜電계량기 조작 같은 비기술적 손실의 값을 소비자가 요금으로 부담해왔다. 상한은 있다. 민간 배전사는 6.5%까지만 회수할 수 있고 메랄코의 2024년 실적은 5.99%. 그래도 남는 문제는 분명하다. 내가 쓰지도 않은 전기 값을 부담하고, 거기에 부가세까지 붙는다. "시스템 손실이 생긴 것이 소비자 잘못은 아니다"라는 것이 대통령의 말이다.


둘째는 자가 태양광이다. 그는 국정연설에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법안의 이름을 먼저 불렀다. '사릴링 쿠리엔테(Sariling Kuryente·내 전기)'을 통과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이틀 뒤인 7 29, 하원 지도부가 그 이름 그대로 법안을 냈다. 이 법안을 발의한 이들은 다름 아닌 파우스티노 디 3세 하원의장과 원내대표인 산드로 마르코스(Sandro Marcos) 의원이다. 그렇다, 산드로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친아들이자 정권의 핵심 실세다. 최고 권력자의 강력한 정치적 의지가 실시간으로 법안에 이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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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이 법안의 핵심은 잉여 전력을 전력망으로 되팔지 않고 혼자 쓰는 시스템의 경우, ERC가 인정하는 역송 방지 장치를 갖췄다면 배전사의 복잡한 사전 승인 없이 '설치 통지(Notice of Installation)'만 하고 곧바로 태양광을 설치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다. 물론 옥상 태양광은 2025년부터 2026년 상반기까지 두 배 가까이 늘었고, 태양광 패널 수입도 2025 62% 증가하는 등 태양광 전력시장이 커지는 흐름인 것은 맞다. 그러나 넷미터링에 정식 등록된 용량은 2025 5월 기준 157MW에 불과하다. 대다수가 역송을 포기한 자가소비용 설치라는 뜻이다. 법안은 제도 밖으로 흐르던 이 수요를 안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재계와 시민사회 모두 이번 조치를 중요한 진전이라며 환영하고 있다. 다만 시민사회는 설비에 붙는 12% 부가세가 더 큰 걸림돌이라고 지적한다. 배전업계는 시스템 손실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맞서고 있다. 사실상 독점에 가까운 사업자의 반발과 필리핀 특유의 관료주의를 이겨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하원 에너지위원장이 공청회 선행을 요구했고, 상원 에너지위원장도 최소 세 차례의 위원회 심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대통령의 결단과 아들까지 동원한 신속한 입법이 현장의 벽을 넘어 필리핀 시민과 기업의 부담을 실제로 덜어줄 수 있을지, 실질적인 구조 개편과 진전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고영경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연구교수 / 아시아비즈랩 연구소장


[글쓴이 소개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지역학 석사를,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재무 전공) 학위를 받았다. 10여 년간 말레이시아 현지 대학 및 연구기관에서 조교수와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디지털통상연구센터 연구교수이자 아시아비즈랩 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아세안 슈퍼앱 전쟁》, 7UPs in Asia》 등이 있으며, 기업 스토리텔러 및 중앙일보 〈마켓 나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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