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경의 아세안 에너지 워치] 에너지 안보화가 불러온 동남아 재생에너지 속도전 - '주권적 인프라'를 향한 생존 전략
본문
동남아 국가들, 재생에너지를 기후정책이 아닌 에너지 안보와 국가 생존을 위한 ‘주권적 인프라’로 인식
경쟁적으로 태양광 확대에 나서고 있지만, 송전망과 제도 개혁이라는 구조적 과제 산적
중동 위기, 동남아 경제를 흔들다
전쟁은 중동에서 벌어졌지만, 충격은 동남아시아에서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의 불안으로 국제 유가와 LNG 가격이 급등했고, 에너지 가격 상승이 빠르게 전 산업으로 전가되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동남아시아 성장률 전망을 5.1%에서 4.7%로 낮췄다. 에너지 충격이 곧바로 성장 둔화로 연결되는 구조가 다시 확인된 셈이다.
이번 위기는 동남아 국가들이 중동 에너지 수입에 얼마나 의존해 있었는지를 드러냈다. 전력과 산업용 에너지가 동시에 흔들리자 각국 정부는 석탄 발전 확대, 가격 통제, 보조금 확대 등 단기 대응에 나섰다. 필리핀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말레이시아는 보조금 지출을 확대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단기 대응책이다.
더 중요한 변화는 다른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번 위기는 그동안 정체되어 있던 재생에너지 전환을 가속하는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주권적 인프라’, 즉 외부 공급망에 의존하지 않고 자국 내에서 전력을 생산·운영할 수 있는 에너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에너지가 더 이상 기후정책의 영역이 아니라 안보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별로 엇갈리는 전환의 경로와 딜레마
대표적인 사례는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태양광 보급이 가장 빠르게 확산된 국가 중 하나지만, 빠른 설비 증가 속도에 비해 국영 전력공사(EVN)의 재정 부담과 경직된 전력구매 구조, 송전망 제약이 겹치면서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 최근 베트남 정부가 직접전력구매계약(DPPA) 제도를 완화하고 민간 거래를 확대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병목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다. 기술과 투자는 앞서갔지만 제도가 뒤따라오지 못했던 전형적인 사례다.
인도네시아는 다른 경로를 택하고 있다. 풍부한 석탄 자원과 기존 전력 구조로 인해 그간 전환 속도는 더뎠지만, 최근 정부는 에너지 자립을 국가 전략의 중심에 두고 100GW 규모의 태양광 확대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초기 단계로 13GW 사업을 우선 추진하며 디젤 발전소의 태양광 전환도 확대 중이다. 다만 워낙 기존 화석연료 의존도가 높아, 전체 설비 중 재생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정체기를 겪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이미 국가에너지전환로드맵(NETR)을 발표했지만, 최근 2GW 규모 LSS6 태양광 사업에 배터리저장장치(BESS)를 의무화하며 전력망 안정성과 계통 운영 능력을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 필리핀은 가장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에너지 비상사태 이후 약 1.5 GW 규모 재생에너지 프로젝트의 조기 가동을 추진했으며, 이 가운데 1.3 GW가 태양광이다. 기존 사업이지만 인허가와 계통 연계 절차를 앞당기며 정책 집행 속도를 바짝 끌어올렸다.
<동남아 5개국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 비중 > 2021 vs. 2025 (단위 : %)
출처 :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 발전설비용량 기준
'주권적 인프라'를 향한 남겨진 과제
다만 이러한 변화가 곧바로 탄탄대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재생에너지 확대는 여전히 송전망 부족, 투자 재원 확보, 규제 및 제도 개혁, 주민 수용성 같은 무거운 구조적 제약을 안고 있다. 방향은 틀었지만 각국의 실행 속도와 역량에는 여전히 온도 차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변화의 방향성만큼은 분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중동에서 시작된 지정학적 전쟁이 동남아시아의 그린전환을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촉매로 작동하고 있다.
고영경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연구교수
[글쓴이 소개]
연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지역학 석사를, 고려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재무 전공) 학위를 받았다. 10여 년간 말레이시아 현지 대학 및 연구기관에서 조교수와 선임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디지털통상 연구센터 연구교수이자 아시아비즈랩 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아세안 슈퍼앱 전쟁》, 《7UPs in Asia》 등이 있으며, 기업스토리텔러 및 중앙일보 〈마켓 나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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